AI 반도체 설계 새 변수 '열'…PPAT 시대 개막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에서 '열(Thermal)' 관리가 전력·성능·면적(PPA)과 동등한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지난 3일 경기 안산에서 열린 인하대학교 반도체 산학연 교류 워크숍에서 복수의 교수진이 AI 반도체 발열 원인과 해결 방향을 집중 논의하며, PPA에 열(T)을 더한 PPAT 개념의 도입을 공식 제안했다. 이는 반도체 설계 철학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워크숍에서는 최리노 인하대 교수, 최창환 한양대 교수, 유현용 고려대 교수, 조재훈 인하대 교수 등이 발열 문제에 대한 소자·소재·패키징 기술 현황을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GPU·NPU 등 AI 가속기 칩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이 최대 1kW에 육박하면서 기존 방열 설계만으로는 열 제어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이 공통 인식으로 확인됐다.
AI 반도체 발열 문제의 핵심 원인은 연산 밀도의 급격한 상승이다. 같은 면적에 트랜지스터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첨단 공정이 발전할수록 단위 면적당 발생하는 열도 비례해서 증가한다. 특히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적층 패키징하는 구조에서는 메모리와 로직 칩 사이 계면 온도가 설계 허용치를 초과하는 문제가 빈번하게 보고되고 있다.
소재 측면에서는 열 전도율이 높은 신소재 도입이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이아몬드 기반 열 확산재, 질화알루미늄(AlN) 기판, 그래핀 방열 패드 등이 차세대 열 관리 소재 후보로 연구되고 있으며, 일부는 이미 고성능 AI 서버용 패키지에 시범 적용 중이다. 열 저항이 낮고 전기적으로 절연 특성을 유지하는 복합 소재 개발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패키징 기술에서는 액체 냉각 방식을 칩 가까이 끌어오는 온칩(on-chip) 마이크로채널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칩 내부에 수십 마이크로미터(μm) 크기의 냉각 채널을 형성하고 그 안에 냉각수나 냉매를 순환시키는 방식은 기존 히트싱크 대비 열 제거 효율을 수 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 이 기술 상용화를 위한 소재·공정 연구가 국내외 대학과 기업 연구소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 기업들은 PPAT 트렌드를 새로운 성장 기회로 포착하고 있다. 방열 인터페이스 소재(TIM, Thermal Interface Material) 분야를 중심으로 국내 화학·소재 기업들의 신규 제품 개발이 늘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AI 반도체 패키지용 고열전도 TIM 인증을 마치고 공급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열 관리 소재 시장은 AI 서버 수요 급증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반도체 패키지용 열 관리 소재 시장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2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핀·질화붕소(BN) 등 첨단 소재를 활용한 고성능 방열 제품 수요가 시장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비 업계도 열 관리 솔루션 강화에 나서고 있다. 램리서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등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들은 식각·증착 장비에 정밀 온도 제어 기능을 고도화하고 있으며, 국내 장비사들도 AI 반도체 공정 특화 열 관리 모듈 개발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소재와 장비가 함께 진화하는 융합형 접근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PPAT 패러다임 전환이 소재·부품 공급망 전반에 걸친 구조 변화를 촉발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워크숍에 참여한 한 교수는 '설계 단계부터 열 분포를 시뮬레이션하고 이에 맞는 소재와 패키징 솔루션을 연동하는 통합 설계 방법론이 앞으로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도 AI 반도체 열 관리를 핵심 기술 과제로 선정하고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AI 반도체 패키징 소재·공정 분야에 대한 R&D 예산을 확대했으며, 산학연 협력 플랫폼을 통해 기업-대학 간 기술 이전을 촉진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PPAT 개념의 확산은 반도체 산업 전반의 경쟁 구도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 과거 설계 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열 관리 소재와 패키징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고도화하느냐가 AI 반도체 패권을 좌우할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