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노모토 ABF 독점력에 '30% 가격 인상' 압박

식품 기업으로 더 잘 알려진 일본 아지노모토가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유례없는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아지노모토가 생산하는 ABF(Ajinomoto Build-up Film)는 AI 반도체를 비롯한 고성능 프로세서의 기판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절연 소재로, 글로벌 수요의 절대적인 비중을 아지노모토 한 곳이 공급하고 있다.
ABF는 반도체 칩과 회로기판(PCB) 사이를 전기적으로 연결하는 기판인 ABF 기판의 핵심 소재다. 미세한 회로를 구현하면서도 전기 신호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고성능 프로세서에 최적화된 소재로, 인텔, AMD, 엔비디아(NVIDIA) 등 주요 팹리스 기업의 첨단 칩 패키징에 광범위하게 쓰인다.
최근 행동주의 성격의 헤지펀드가 아지노모토를 상대로 ABF 제품 가격을 현 수준보다 30% 이상 인상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해당 펀드는 아지노모토가 독점적 공급 지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낮은 가격 정책을 유지해 주주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인 가격 정상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서는 아지노모토의 가격 인상 가능성을 매우 현실적인 리스크로 받아들이고 있다. ABF를 대체할 수 있는 동급 소재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데다, 주요 반도체 기판 제조사인 이비덴(Ibiden), 신코 일렉트릭(Shinko Electric) 등이 아지노모토의 ABF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ABF 기판 시장은 AI 반도체 투자 붐의 최대 수혜 분야 중 하나다. 엔비디아의 H100, H200, Blackwell 시리즈 등 AI 가속 프로세서에는 고사양 ABF 기판이 사용되며, 수요 급증으로 인해 이미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아지노모토의 가격 인상까지 현실화될 경우 AI 서버 제조 원가 부담이 상당히 커질 수 있다.
아지노모토 측은 구체적인 가격 정책 변경 여부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은 "아지노모토가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점진적으로 가격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반의 비용 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변수"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에게도 이 이슈는 예의주시해야 할 사안이다. 삼성전기, 대덕전자 등 국내 ABF 기판 제조사들은 아지노모토로부터 ABF 소재를 공급받고 있어 가격 인상 시 직접적인 원가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또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정에도 ABF 기판이 사용되기 때문에 간접적인 영향권에도 있다.
이 사태는 소재 분야의 독점 구조가 글로벌 공급망에 얼마나 큰 취약성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지정학적 리스크와 맞물릴 경우 단일 공급사 의존도는 산업 전반의 생존을 위협하는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재 공급망 다변화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는 ABF 대체 소재 및 차세대 패키징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리 기판(Glass Substrate)을 ABF 기판의 대안으로 활용하는 기술이 인텔 등을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삼성전기도 유리 기판 양산 기술 확보에 상당한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리 기판의 상용화는 아직 2~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투자자들은 ABF 소재 공급망 이슈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테스트) 분야의 핵심 리스크 요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소재 공급 안정성을 확보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의 경쟁력 격차가 확대될 수 있으며, 아지노모토의 대안 육성을 위한 전략적 투자 필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이번 아지노모토 이슈는 '식품 회사가 반도체 소재 독점 기업'이라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통해, 첨단 산업의 공급망이 얼마나 특정 기업·기술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공급망 다각화 전략이 소재 단계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