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업계, 반도체 AI 소재로 대전환 가속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오랜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 반도체·인공지능(AI) 소재 시장을 낙점하고 대대적인 사업 전환에 나서고 있다. 기존 범용 석유화학 제품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된 가운데, 고부가가치 소재 분야로의 피벗(pivot·방향 전환)이 업계의 새로운 생존 공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2022년 이후 글로벌 공급 과잉과 중국발 저가 제품 공세가 맞물리며 극심한 수익성 악화를 겪어왔다. 국내 주요 석화 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은 최근 2~3년 사이 평균 5%포인트 이상 하락했으며, 일부 기업은 적자 전환까지 경험했다. 이에 업계는 '버티기' 전략을 포기하고 체질 개선에 본격 착수한 것이다.
반도체 소재 시장은 AI 수요 폭증에 힘입어 고성장 궤도를 달리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약 750억 달러(약 100조 원)에 달하며, 2030년까지 연평균 7%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첨단 패키징용 소재와 초고순도 화학물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KCC는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에 대응해 AI 데이터센터용 전력반도체 소재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전력반도체에 쓰이는 실리콘 웨이퍼 봉지재(반도체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소재)와 방열 소재 라인업을 강화하며, 데이터센터 시장 공략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 중이다.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 국내 대형 석화사들도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빛을 이용해 회로를 새기는 핵심 소재), 고순도 용제, CMP 슬러리(반도체 표면을 연마하는 소재) 등 첨단 반도체 소재 개발에 잇달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 소재는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국산화 필요성이 높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존 석화 사업만으로는 중국과의 원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며 '반도체·AI 소재는 기술 장벽이 높고 마진이 좋아 우리 업계가 반드시 진출해야 할 분야'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석화업계의 고부가 소재 전환은 생존이 아닌 성장을 위한 필수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민성장펀드는 최근 케이블·반도체 분야에 3,700억 원 규모의 지원을 결정하며 정부 차원의 반도체 소재 육성 의지를 뚜렷이 했다. 금융위원회가 주관하는 이 펀드는 국가 전략 산업에 정책 금융을 집중 투입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며, 민간 투자 촉진 효과도 기대된다.
일본은 2019년 수출 규제를 통해 국내 반도체 소재 공급망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바 있다. 이후 국내 기업들의 소재 국산화 움직임이 가속화됐고, 현재는 불화수소(HF)·포토레지스트·불화폴리이미드 등 일부 소재에서 국산화율이 크게 높아졌다. 업계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더 광범위한 소재 자립을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도 국내 석화업계에 기회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법(CHIPS Act)과 유럽의 반도체법 시행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해외 생산 기지 확대가 이어지면서, 현지에서 소재를 조달하려는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오는 7월 전력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2026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하계학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 행사는 전력반도체 소재·공정 기술의 최신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자리로, 산학연 전문가 500여 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시는 전력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지역 전략 산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반도체 소재로의 전환에 성공한 석화 기업들이 중장기적으로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평가) 재평가를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소재는 일단 공급사로 인증을 받으면 교체가 어렵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 기반이 된다'고 분석했다.
향후 시장 전망은 밝지만 진입 장벽도 만만치 않다. 반도체 소재는 수율(정상 제품 비율)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도체 기업들이 검증에 매우 엄격하며, 실제 양산 적용까지 통상 3~5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선제적 R&D 투자와 함께 반도체 고객사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 구축이 성패를 가를 핵심 요소로 꼽힌다.
국내 석화업계의 반도체 소재 대전환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대일 소재 무역 적자 감소와 반도체 공급망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와 업계가 손잡고 속도를 내고 있는 만큼, 향후 2~3년이 구조 전환의 결정적 시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