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업계, 반도체 소재로 생존 돌파구 찾는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범용 화학 제품의 수익성 악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새로운 활로로 반도체 소재 분야를 주목하고 있다. AI 산업의 급성장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반도체 소재 시장도 함께 고성장 궤도에 올라서고 있기 때문이다.
OCI홀딩스는 이우현 회장 주도 아래 태양광 패널 생산 공장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용 첨단 소재 사업으로의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 회장은 '범용 소재로는 더 이상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며 고부가가치 소재 중심의 포트폴리오 재편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OCI가 주력하는 반도체 소재에는 고순도 폴리실리콘, 포토레지스트(감광제), 식각 공정용 특수 가스 등이 포함된다. 이들 소재는 반도체 회로를 초미세 단위로 정밀하게 구현하는 데 필수적으로, 고도의 기술력과 품질 관리 능력이 요구되는 고마진 제품군이다.
업계 전반의 움직임도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롯데케미칼, 금호석화, SKC 등 국내 주요 석화 기업들도 반도체 봉지재, 반도체용 폴리이미드 필름, CMP 슬러리(연마제) 등 특수 소재 사업 투자를 확대 중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IHS마킷에 따르면 반도체 소재 시장은 2024년 약 800억 달러(한화 약 110조 원) 규모로, 오는 2028년까지 연평균 6%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소재 시장은 현재 일본 기업들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JSR, 신에츠화학, 스미토모화학 등 일본 소재 기업들은 포토레지스트, 실리콘 웨이퍼, 특수 세정액 등 핵심 분야에서 60~80%에 달하는 글로벌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어, 국내 기업들이 넘어야 할 높은 기술적 장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 사태는 국내 소재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오히려 국내 기업들의 기술 개발 의지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이후 국내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은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이며, 정부 또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육성 예산을 매년 늘려 지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반도체 시대의 도래가 소재 업계에도 구조적 수혜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분석한다. 한국화학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엔비디아 GPU나 HBM 메모리 같은 고성능 반도체일수록 소재 원가 비중이 높아지고, 소재 품질이 제품 성능을 좌우하기 때문에 국내 소재 기업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소재 투자는 수도권과 충청권에 집중된 경향이 있으나, 최근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시스템 반도체와 연계한 소재 클러스터 조성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 균형 발전 차원에서 반도체 특화 단지를 분산 배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업계와 학계에서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의 일환으로 반도체 소재 분야 R&D 예산을 2025년까지 연간 1조 원 이상으로 확대하고, 세제 혜택과 인허가 신속 처리 등 지원 체계를 정비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0대 핵심 반도체 소재를 선정해 집중 육성하는 로드맵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 소재 사업은 초기 투자 비용이 크고 고객사(반도체 제조사)의 인증 절차가 까다로워 진입 장벽이 높지만, 한번 공급망에 편입되면 장기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수요 기업들도 소재 공급망 다변화 차원에서 국내 소재 기업 육성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2~3년이 국내 반도체 소재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결정적 시기라고 보고 있다. 지금의 투자와 기술 개발이 10년 후 시장 지위를 결정짓는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석화 기업들의 소재 전환 움직임은 단순한 사업 다각화를 넘어 생존을 건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