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업계, 전력 인프라 소재 신사업 가속화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전통적인 범용 화학 제품 중심의 사업 구조를 탈피해 반도체와 전력 인프라용 첨단 소재 분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저가 공세로 인한 범용 석화 제품의 수익성 악화와 AI·에너지 전환 시대에 열린 새로운 시장 기회에 동시에 대응하는 전략이다.
전력 인프라 소재는 변압기, 케이블, 전력 반도체 등에 쓰이는 고기능성 소재를 통칭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증가로 고압 전력 설비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에 사용되는 고내열·고절연 에폭시 수지와 특수 실리콘 소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글로벌 전력 인프라 소재 시장 규모는 2025년 기준 약 450억 달러(약 69조 원)에 달하며, 2030년까지 연평균 8%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관련 전력 소재 수요는 연평균 15% 이상의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시장조사기관들은 예측하고 있다.
롯데케미칼, SK어드밴스드, 금호석유화학 등 주요 석화 업체들이 전력 인프라 소재 개발에 연구개발 자원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기존 석화 공정에서 얻는 원료를 활용해 고부가 특수 소재로 전환하는 '업스트림 통합' 전략을 추진 중이다.
한 석화 업계 관계자는 '전력 반도체용 봉지재, 변압기용 고절연 에폭시 수지 등은 기존 화학 기술과의 연계성이 높아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사업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부 업체는 내년 시제품 공급을 목표로 고객사와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경쟁 구도를 보면, 독일의 헨켈과 바스프, 일본의 스미토모베이클라이트 등이 전력 인프라 소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국내 석화 업체들이 이 시장에 진입할 경우, 가격 경쟁력과 고객 근접성을 무기로 일부 특화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에너지 신산업 소재 기술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전력 인프라 관련 특수 소재 R&D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관련 예산은 전년 대비 약 20% 늘어난 1,200억 원 규모로, 석화 업계의 고부가 소재 전환을 뒷받침하는 정책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다.
국내 전력 인프라 산업의 직접적인 수혜도 기대된다.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효성중공업 등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이 글로벌 변압기·고압차단기 수출 호황을 누리는 상황에서, 국산 소재 조달이 가능해지면 공급망 안정성과 원가 경쟁력이 동시에 향상된다.
전문가들은 석화 업계의 전력 인프라 소재 진출이 단순한 불황 탈출책이 아닌 장기적 산업 재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화학 산업 연구원은 '범용 석화의 수익성 회복은 어렵지만, 특수 소재로의 전환은 마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분석했다.
투자 측면에서는, 전력 인프라 소재 사업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까지 2~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양산 체제 구축과 주요 고객사 인증 획득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관련 기업 주가의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으로 시장은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석화 업계의 전력 인프라 소재 사업화는 AI 시대의 에너지 수요 폭증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는 전략적 선택이다. 단기적 성과보다는 기술력 축적과 고객 신뢰 확보에 주력하며 중장기 경쟁력을 쌓아가는 과정이 핵심이 될 전망이다.
시장 전망 상 2027년 이후 전력 인프라 소재 시장은 에너지 전환 정책과 AI 투자 확대의 이중 수혜를 받으며 본격 성장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시기를 겨냥한 선제적 기술 및 설비 투자가 국내 석화 업체들의 미래 경쟁력을 결정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