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美日 소부장 증설 경쟁…韓만 자금줄 고갈

중국·미국·일본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 국가 차원 대규모 투자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가운데, 국내 소부장 업체들은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으며 증설 속도가 뒤처지고 있다는 경고가 업계에서 높아지고 있다. 소부장 증설 전쟁에서 밀릴 경우 국내 반도체 생태계 공급망 취약성이 심화된다는 우려도 구체화되고 있다.
중국은 첨단 노광장비 수출 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자국산 장비 개발에 수조 원 규모의 국가 예산을 투입 중이다. SMEE(상하이마이크로전자장비) 등이 28나노미터급 이하 공정 진입을 목표로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최첨단 공정까지는 격차가 있으나 중간 공정 시장 점유율 확대는 한국 소부장 기업에도 실질적 위협이 된다.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 자금으로 국내 소부장 업체의 신규 공장 건설을 지원하고, 일본도 경제산업성 보조금으로 신에쓰화학·도쿄일렉트론 등의 증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반도체 팹이 들어서는 지역에 소부장 거점을 함께 짓는 '공급망 동반 이전' 전략이 미·일 양국에서 가시화되며 새로운 공급망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 소부장 업체들은 금리 부담과 벤처 투자 위축으로 증설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책금융 지원이 일부 이루어지나 규모가 경쟁국 대비 작고, 민간 투자 시장에서 소부장 분야에 대한 관심도 AI·바이오 섹터 대비 낮다. 대기업 중심 지원 구조에서 중소·중견 소재 업체는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잦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생산 공장이 완공된 뒤에야 소부장 공급 기반이 뒤쫓아 가는 '후행 구조'가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신규 팹 건설 속도를 소부장 공급망이 따라가지 못하면 해외 의존도가 높아지는 악순환이 고착된다. '소부장이 국가 경쟁력을 만든다'는 인식을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북 구미를 중심으로 한 남부권 반도체 소부장 공급망 구축 필요성도 공론화되고 있다. 수도권·충청권에 집중된 현 공급망 구조는 물류비·납기 리스크를 높이며, 균형 발전 측면에서도 남부권 거점화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많다. AI 반도체 수요 확대와 맞물려 구미 중심 남부권 소부장 허브 육성 논의가 정치권에서도 구체화되고 있다.
한 소부장 업계 관계자는 '정부 지원이 수요 측 대기업 위주로 설계돼 있어 공급 측 중소·중견 업체의 증설 자금 지원이 부족하다'며 '직접 보조금 또는 세액공제 확대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화단지 지정 자체와 실제 기업 유치·자금 지원은 별개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소부장 증설 경쟁에서 뒤처지면 장기적으로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핵심 소재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가 심화된다. 이는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적 이슈다. 단기 수익성보다 공급망 자립도를 기준으로 정책 우선순위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소부장 자금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정책금융 확대와 대형 수요 기업·소부장 업체 간 '앵커 계약' 문화 정착이 병행돼야 한다. 안정적 수주 확약이 있어야 민간 금융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강국 도약을 위해서는 화려한 팹 건설 발표보다 소부장 공급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정책 집중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요구다.
전문가들은 소부장 증설 투자 격차가 확대될 경우 한국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도체 공장 가동률이 소부장 공급 능력에 묶이는 상황을 막으려면 소부장 증설을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의 필수 구성 요소로 포함시키는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 뿌리가 단단해야 진짜 반도체 강국이 된다는 교훈을 정책 설계에 녹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