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실리콘밸리에 50억 달러 R&D 거점 'EPIC 센터' 개소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에 5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장비·공정 연구개발(R&D) 복합시설 'EPIC(Engineering Process Innovation Center) 센터'를 공식 개소했다. 이 시설은 단일 반도체 장비 R&D 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EPIC 센터는 부지 면적만 축구장 수십 개에 달하며, 최첨단 클린룸과 시험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는 이 시설을 통해 2나노미터 이하 공정 소재·장비를 개발하고, 게이트-올-어라운드(GAA) 트랜지스터 및 3D 패키징 기술을 집중 연구할 방침이다.
투자 배경에는 AI 반도체 수요 급증이 있다. 엔비디아·AMD 등 팹리스 기업들이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이종 집적(칩렛) 패키지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리면서, 이를 구현할 장비와 소재의 복합 R&D 필요성이 커졌다. EPIC 센터는 장비-소재-공정을 한 공간에서 통합 검증하는 개념으로 설계됐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최고경영자(CEO) 게리 디커슨은 개소식에서 '반도체 산업의 다음 10년은 장비 단독이 아니라 소재·공정·장비의 통합 혁신이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EPIC 센터가 고객사와 공동 개발을 가속화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PIC 센터의 또 다른 특징은 고객사 협업 공간이다. TSMC·삼성전자·인텔 등 주요 파운드리와 메모리 기업이 이 시설을 활용해 양산 전 공정 검증을 진행할 수 있다. 어플라이드 측은 이미 주요 고객사 10여 곳과 협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시설 내에는 원자층증착(ALD)·화학기계연마(CMP)·물리기상증착(PVD) 등 핵심 장비 라인업 전체가 설치된다. 특히 차세대 2D 소재(MoS₂, WSe₂ 등)와 저유전율 절연막 소재의 장비 적합성을 동시에 평가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된다는 점에서 소재 업계의 관심도 높다.
국내 소재·부품 기업에도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의 장비 혁신이 가속화될 경우, 이에 대응하는 식각 가스·CMP 슬러리·세정액 등 공정 소재의 스펙 변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동진쎄미켐·솔브레인·SK머티리얼즈 등 국내 소재 기업들의 R&D 대응 속도가 중요해질 전망이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는 2025 회계연도 매출이 277억 달러를 기록하며 반도체 장비 업계 1위 자리를 공고히 했다. 회사 측은 EPIC 센터 투자가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집행되며, 이 중 상당 부분이 첨단 패키징 및 AI 인프라용 장비 개발에 배분된다고 밝혔다.
경쟁사 대비 투자 규모도 주목된다. ASML이 네덜란드 벨트호벤 본사에 집중 투자하고, 램 리서치가 오레곤 R&D를 확충하는 것과 달리,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는 실리콘밸리 내 단일 대형 캠퍼스 방식을 택했다. 이는 스탠퍼드대·UC버클리 등 인근 연구기관과의 인재 연계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미국 정부도 이번 투자를 환영했다. 상무부는 CHIPS Act 이행 차원에서 첨단 장비 R&D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이 EPIC 센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미-중 기술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핵심 장비 개발의 미국 내 거점화는 정책적으로도 부합하는 방향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EPIC 센터가 단순 R&D 시설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상징적 거점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한 반도체 장비 애널리스트는 '어플라이드가 이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 것은 AI 반도체 사이클이 최소 10년 이상 지속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국내 장비·소재 업계 입장에서는 협력과 경쟁의 이중 구도가 형성된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의 기술 주도권이 강화될수록 국내 기업이 특정 니치(틈새) 소재나 부품에서 독자적 공급자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소부장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장비사와 공동 개발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면 차세대 공정에서 소외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