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반도체 생태계, 소재·부품 기업 이탈 위기

경북 구미 지역의 반도체 소재·부품 협력 생태계가 흔들리고 있다. 삼성전자의 호남권 신규 팹(반도체 공장) 건설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구미에 뿌리를 둔 소재·부품 중소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이전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팹 자체의 이동보다 '소재·부품 기업의 이동'이 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도체 공장 주변에 클러스터를 이루며 납품 단가와 물류비를 최적화해온 협력사들이 이동할 경우, 구미 지역 산업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다.
구미국가산업단지에는 현재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 기업 약 200여 개사가 집적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기업의 연간 매출 합계는 약 3조 원 이상으로, 구미 제조업 생산 총액의 10%를 웃돌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호남 신규 팹이 실제로 가동될 경우, 인근 지역에 소재·부품 공급망이 새롭게 구축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팹 반경 50km 이내에 협력사를 배치하는 것이 업계 관행이라는 점에서, 구미 업체들의 이전 또는 신규 거점 설립 검토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경북도와 구미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소재·부품 특화 산단 조성 및 앵커 기업 유치 전략을 재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미시 관계자는 "기존 협력사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도록 임대 단가 인하, R&D 지원 확대 등 패키지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소재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상황을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닌 국가 공급망 효율화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반도체 소재 애널리스트는 "특정 팹과의 물리적 근접성이 납기 경쟁력의 핵심인 만큼, 소재 기업의 이동은 경제적 합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반도체 소재 시장은 연간 약 15조 원 규모로 추산되며, 이 중 구미권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에 달한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수도권 및 충청권으로의 소재 기업 이동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어, 지방 생태계 위기는 구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반도체 클러스터 균형발전 로드맵'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정 지역 팹 건설로 인한 기존 생태계 교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전 기업에 대한 지원과 기존 거점에 대한 육성 정책을 병행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TSMC 구마모토 팹 유치 이후 소재·부품 기업들이 규슈 지역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기존 산업 클러스터 재편이 발생했다. 한국 역시 유사한 구조조정이 진행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구미 지역 기업들은 자구책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 일부 소재 기업은 구미 거점을 유지하면서 호남 지역에 생산 자회사를 설립하는 '투트랙 전략'을 검토 중이다. 이 경우 초기 투자비 부담이 늘어나지만, 복수의 팹 고객사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향후 시장 전망과 관련해, 증권업계는 구미 소재 기업 중 기술력이 높은 상위 기업들은 오히려 호남 팹 수혜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반면 단순 가공 및 유통 중심의 중소 협력사들은 물류 경쟁력 약화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결국 이번 사태는 한국 반도체 소재·부품 산업의 지역 편중 문제를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함께 장기적인 클러스터 재편 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국내 반도체 공급망 전체의 효율이 저하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