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과학 인재 '톱티어 비자' 문턱 낮춰…소재·산업재 R&D 기대

정부가 해외 우수 과학기술 인재 유치 활성화를 위해 '톱티어(Top-Tier) 비자'의 발급 요건을 대폭 완화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세계 상위권 대학 출신이거나 국제적으로 저명한 논문 실적을 보유한 경우에만 인정됐던 기준을 넓혀, 산업 현장 경험이 풍부한 전문 인력도 포함하도록 개편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번 개편의 배경에는 반도체·첨단소재·이차전지·바이오 등 전략 산업 분야의 심각한 고급 인력 부족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반도체 분야에서만 2026년 기준 약 3만 명의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 가운데 석·박사급 R&D 인력 부족분이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톱티어 비자 요건은 ▲세계 200위 이내 대학 출신 이공계 석박사 ▲글로벌 500대 기업 5년 이상 핵심 연구직 경력자 ▲국제 특허 3건 이상 보유자 ▲국가 R&D 과제 책임자 경력자 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기존 대비 대상자 범위가 약 2~3배 넓어질 것으로 추산된다.
소재·산업재 업계는 이번 조치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특히 첨단 세라믹 소재, 탄소복합재, 고기능성 폴리머 등 분야는 글로벌 전문가 풀이 매우 좁아 국내 기업들이 해외 석학이나 전문가를 영입하고 싶어도 비자 요건에 막히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였다.
한 소재 전문 기업의 R&D 임원은 "독일이나 일본 출신의 세라믹 소재 전문가를 데려오려 해도 국내 비자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며 "이번 요건 완화로 실질적인 인재 유입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경쟁 측면에서 보면 미국, 싱가포르, 독일 등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과학기술 인재에 대한 패스트트랙 비자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의 'O-1 비자', 싱가포르의 'Tech.Pass' 등이 대표적이며, 한국이 이에 비해 뒤처진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조치와 함께 정부는 외국인 고급 인재의 가족 동반 체류 요건 완화, 자녀 교육 지원, 주거 지원 등 정착 인프라 개선도 병행 추진하기로 했다. 우수 인재 유치는 비자 요건 완화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생활 환경 전반의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문가 조언을 반영한 것이다.
반도체 소재 분야의 경우 이번 조치가 특히 큰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반도체 소재 기업들은 EUV 포토레지스트, 저유전율 절연막, 고순도 특수가스 등 첨단 소재 개발을 위한 글로벌 전문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소재 협력사들도 유사한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다.
톱티어 비자 제도 개편과 함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글로벌 인재 R&D 펠로십' 프로그램도 확대 운영할 방침이다. 이 프로그램은 국내 기업·연구소에 채용된 외국인 석박사급 인재에게 연간 최대 5,000만 원의 연구비를 추가 지원하는 제도다.
전문가들은 이번 제도 개편이 단기적으로는 첨단 소재, 반도체 장비 분야에 즉각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이공계 교육 시스템 전반의 경쟁력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외국 인재 유치와 국내 인재 육성은 경쟁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 관계"라고 말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관련 비자 신청은 2026년 하반기 중 새로운 기준에 따라 처리될 예정이며,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심사 처리 기간도 현행 평균 6주에서 3주 이내로 단축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산업재·소재 분야 기업들은 이 제도를 활용한 글로벌 인재 채용 전략을 서둘러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오고 있다.
결국 이번 톱티어 비자 제도 개편은 첨단 소재, 반도체, 산업재 분야의 글로벌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적 자원 전략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부가 제도 개선에 그치지 않고 외국인 인재가 실질적으로 국내에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후속 조치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것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