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업계, 반도체 소재 전환 가속…생존 전략 뱃머리 돌려

국내 주요 화학기업들이 전통적인 범용 석유화학 제품의 수익성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 소재 분야로 사업 축을 이동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업 다각화를 넘어 기업 생존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자리잡는 양상이다.
범용 석유화학 시장은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2023년부터 이어진 업황 침체가 2025년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 화학제품의 스프레드(원가와 판매가 차이)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반면 반도체용 특수 화학 소재 시장은 AI 반도체 수요 급증과 함께 고성장 국면을 이어가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세정액, 스트리퍼, CMP 슬러리 등 첨단 공정에 쓰이는 소재들은 기술 진입 장벽이 높아 높은 마진을 유지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국내 주요 화학기업 10곳 중 7곳이 반도체 소재 관련 R&D 투자를 확대했거나 신규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 것으로 집계됐다. 투자 규모는 기업별로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케미칼은 반도체 소재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특수 가스 및 전자재료 사업 확장에 나섰으며, 금호석유화학은 반도체 봉지재(EMC) 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화솔루션도 반도체 패키징용 첨단 소재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한 대형 화학사 임원은 "범용 화학 제품의 시대는 사실상 저물고 있다"며 "10년 안에 생존하는 기업은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소재 등 기술 집약적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곳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전환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기술 인력 부족과 초기 투자 부담이다. 반도체 소재는 나노미터(nm) 단위의 정밀 제어가 요구되기 때문에, 기존 범용 화학 공정 인력을 곧바로 전환 배치하기 어렵다. 업계에서는 관련 전문 인력이 수요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호소한다.
정부도 이 흐름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5년 반도체 소재·부품 국산화 지원 과제에 1,200억 원을 배정했으며, 소재 기업의 반도체 수요기업과의 매칭 프로그램도 확대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독일 바스프(BASF), 미국 듀폰(DuPont) 등 글로벌 화학 대기업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반도체 소재 부문을 핵심 성장 사업으로 재편해 왔으며, 현재 해당 부문이 전체 이익의 30~40%를 차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화학업계가 글로벌 선도 기업들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M&A(인수합병)와 기술 라이선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독자 개발만으로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지적이다.
시장조사기관 IHS마킷은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이 2030년까지 약 700억 달러(약 95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 기업들이 이 시장에서 5% 점유율만 확보해도 연간 5조 원에 가까운 매출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투자 측면에서는 반도체 소재 전환에 성공한 기업들이 밸류에이션 프리미엄을 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들은 반도체 소재 매출 비중이 높은 화학기업일수록 주가수익비율(PER) 할증이 적용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