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헬륨 봉쇄, 희귀가스 공급망 지형 뒤흔든다

중국이 헬륨 수출을 전격 금지하면서,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희귀가스(Noble Gas) 전반의 공급망 리스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헬륨 외에도 네온(Ne)·크립톤(Kr)·제논(Xe)·아르곤(Ar) 등 이른바 '비활성 기체' 계열 희귀가스들이 반도체 제조 공정 곳곳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이번 사태가 촉발한 공급망 불안은 헬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희귀가스 중 네온은 반도체 노광(리소그래피) 공정에 사용되는 엑시머 레이저의 핵심 원료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산 네온 공급이 막히면서 가격이 반년 만에 수백 퍼센트 폭등한 전례가 있다. 크립톤과 제논은 고급 광학 코팅 및 이온 주입 공정에 활용되며, 대기 중 농도가 극히 낮아 생산 단가가 높다.
전 세계 희귀가스 시장 규모는 연간 약 30억 달러(약 4조 원) 수준으로 추정되며, 중국은 생산 능력 증대를 통해 주요 희귀가스 품목에서 시장 지배력을 빠르게 키워왔다. 특히 헬륨의 경우 중국은 러시아산 수입·재수출 비중이 높아, 이번 수출 금지가 아시아 시장 조달에 미치는 충격이 직접적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희귀가스 조달 현황을 살펴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주요 희귀가스에 대해 복수 공급사와 장기 계약을 유지하고 있으나 현물 시장 노출 비중이 일부 존재한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헬륨의 경우 3~6개월치 안전재고를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가격 급등이 지속되면 재고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 고민이다.
에어리퀴드·린데·에어프로덕츠 등 글로벌 산업가스 3대 메이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 지역 내 희귀가스 공급 인프라 확충에 투자를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카타르·미국 텍사스·호주 등지에서 생산되는 헬륨을 아시아에 직공급하는 파이프라인 및 탱크 물류 네트워크 강화 계획이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가스안전공사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희귀가스를 국가 전략물자로 격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재 헬륨·네온·크립톤 등은 일반 수입 품목으로 관리되고 있어, 별도의 비축 의무나 수입 다변화 지원책이 미흡한 상황이다. 정부는 올 하반기 중 관련 법 개정안 마련에 착수할 방침이다.
일본은 2022년 네온 사태 이후 경제산업성 주도로 희귀가스 공급망 강화 대책을 수립하고 국내 기업들의 재활용 기술 개발을 적극 지원해왔다. 일본 내 희귀가스 재활용률은 현재 40~50%에 달하는 반면 한국은 15% 미만으로 추정돼, 재활용 인프라 확충이 시급한 과제로 지적된다.
희귀가스 자립화 기술 개발도 관심을 받고 있다. 공기 중에서 희귀가스를 분리·정제하는 심냉분리(Deep-Cryogenic Separation) 기술은 이미 상용화돼 있으나, 국내에서는 이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소수에 불과하다. 덕양·SK에어가스 등 일부 국내 산업가스 기업들이 관련 설비 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이번 중국의 헬륨 수출 금지 조치가 '자원 무기화'의 새로운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공급망 전문가는 '반도체 소재 안보 전략이 광물·금속을 넘어 가스류로 확장돼야 한다'며 '희귀가스를 핵심 전략물자로 지정하고 비축 기준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희귀가스 공급망 다변화와 재활용 기술 투자는 단기적으로 비용이 수반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공급 리스크 완화와 원가 절감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사용 후 희귀가스를 회수·재정제해 재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국내 소재 기업들에게 새로운 수익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향후 헬륨 수출 금지가 장기화되거나 중국이 네온·크립톤 등 다른 희귀가스로 통제 범위를 확대할 경우, 글로벌 반도체 생산 비용 상승은 불가피하다. 시장조사기관들은 이 경우 첨단 반도체 원가가 5~10%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추정하며, 이는 최종 전자제품 가격에도 순차적으로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