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공급망 병목, 기술 아닌 '소재 부족'

AI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공급망의 진짜 병목이 기술 설계나 파운드리 생산 능력이 아닌 소재와 특수 화학품 공급 부족에 있다는 분석이 업계 전반에서 힘을 얻고 있다. 설계 능력과 제조 인프라가 아무리 뛰어나도 소재가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생산 라인 자체가 멈출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공급망 전문가들은 'AI 반도체 설계 역량은 매우 빠르게 발전했지만, 이를 지탱하는 소재·공정가스·특수화학품 공급 인프라가 수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팹리스 기업이 칩 설계를 완성해도 파운드리에서 양산에 필요한 소재가 부족하면 출하 일정이 수주에서 수개월씩 지연되는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특수 공정 가스류의 수급 불안이 심각하다.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네온, 크립톤, 제논 등 희귀 공정 가스는 생산 설비 특성상 증설 속도가 느리고 특정 지역에 편중된 생산 구조로 인해 공급 탄력성이 낮다. AI 반도체 수요 급등이 이들 소재에 대한 수요를 더욱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어 단기 공급 불균형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선진 패키징 기술에 사용되는 첨단 소재들도 주요 병목 지점으로 지목된다. 칩렛 구조를 연결하는 인터포저 소재, 적층 구조의 열을 방산하는 열계면소재(TIM), 칩과 기판 사이를 채우는 언더필 소재 등의 수요가 HBM 수요와 함께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 소재를 생산할 수 있는 업체 수가 전 세계적으로 제한적이어서 공급 확대 속도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소재 기업들도 이 상황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공급 압박을 받고 있다. 한 소재 기업 임원은 '고객사 주문 물량은 1년 이상 밀려 있지만, 정작 우리가 사용하는 원재료를 제때 확보하지 못해 납기 일정을 조율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토로했다. 이는 공급망 병목이 여러 단계에 걸쳐 동시에 발생하는 복합적인 구조임을 보여준다.
글로벌 소재 대기업들도 AI 반도체 수요에 대응한 증설 투자를 서두르고 있다. 독일 머크, 신에츠화학, 엔테그리스, 레르드가스 등 주요 소재·가스 업체들이 생산 설비 확대와 연구개발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 그러나 소재 분야는 기존 화학 장치 산업과 달리 고순도 공정 조건이 극도로 까다로워 신규 설비 가동까지 통상 2~4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I 반도체 소재 병목 현상은 가격 상승 압력으로 직결되고 있다. 업계 데이터에 따르면 일부 특수 공정 소재의 가격이 2년 전 대비 30~50% 상승했으며, 장기 공급 계약을 맺지 않은 소규모 파운드리는 소재 확보 자체가 어려운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소재 조달 경쟁력이 파운드리의 수주 역량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부상한 것이다.
국내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는 이 상황을 국산화 가속 기회로 삼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정부와 업계는 소부장 자립화를 앞당기기 위해 R&D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품질 인증을 통과한 국내 소재 기업들이 대형 반도체 고객사의 공급망에 빠르게 편입되고 있다. 소재 국산화는 단가 절감을 넘어 공급 안정성 확보라는 전략적 가치를 갖게 됐다.
시장 조사기관 SEMI에 따르면 2026년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 규모는 약 810억 달러에 달하며, AI 반도체 확산에 힘입어 2028년에는 1,00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5년 전 대비 두 배 이상 성장한 수치로, 소재 분야가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소재 병목 해소를 위해 단기적으로는 조달처 다변화, 중기적으로는 국산화 비율 제고, 장기적으로는 소재 기술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AI를 활용한 소재 발견 속도 향상이나 공정 소재 재활용 기술 고도화 등 새로운 접근법도 주목받고 있으며, 소재 기술이 반도체 경쟁의 새로운 전선으로 부상하고 있다.
AI 반도체 공급망의 소재 병목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다. 신규 소재 생산 인프라 구축에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그 사이 안정적인 소재 조달 능력을 갖춘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소재 확보 역량이 곧 AI 시대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재 기업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지속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