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유럽 반도체 연합, 日에 AI 소재 동맹 제안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반도체 연합이 일본 측에 AI 첨단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한 소재·장비 협력 동맹을 공식 제안했다. 인피니언, 보쉬, ASML 등 유럽 주요 반도체·소재·장비 기업들이 참여하는 이 협의체는 일본의 소재 기술력과 유럽의 장비·설계 역량을 결합해 중국 의존에서 벗어난 독자적 첨단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번 제안의 핵심 배경은 AI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소재·공정 기술에서 유럽과 일본이 상호 보완적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반도체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실리콘 웨이퍼 등 핵심 소재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으며, 유럽은 리소그래피 장비(ASML EUV)와 차세대 패키징 기술에서 앞서 있다.
유럽 반도체 연합 측은 구체적으로 차세대 EUV(극자외선) 노광 공정용 소재 공동 개발, AI 칩 패키징용 신소재 기술 교류, 희귀금속 대체 소재 R&D 협력 등을 주요 협력 아젠다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연내 공식 MOU 체결을 목표로 실무 협의를 진행 중이다.
독일 반도체 산업협회 관계자는 '미·중 디커플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유럽과 일본이 소재·장비 분야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이번 동맹은 서방 진영의 기술 자립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움직임은 미국이 주도하는 칩스법(CHIPS Act) 기반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도 맥을 같이한다. 미국은 핵심 소재·장비의 대중 수출 규제를 지속 강화하면서 동맹국들의 대체 공급망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핵심광물 관련 폐기물 수출 규제에도 서명하며 공급망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 소재 업계도 이번 유럽-일본 동맹 구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유럽-일본 연합이 공고해질 경우 한국 소재 기업들의 글로벌 공급망 내 포지셔닝 전략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체적 수치로는 유럽 반도체 소재·장비 시장이 2025년 기준 약 450억 유로 규모로, 연평균 11% 성장 중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액은 연간 400억 달러를 상회하며, 글로벌 핵심 소재 시장에서 30~50% 점유율을 보유한 품목이 다수다.
국내 업계 전문가는 '한국이 유럽-일본-미국 공급망 블록에서 배제될 경우 소재 수출 경쟁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공급망 외교와 기술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한편,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한국판 국부펀드(가칭)는 AI·반도체·소재·부품·장비를 핵심 투자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내년 정식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펀드가 국내 소재 기업들의 글로벌 공급망 참여를 뒷받침하는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유럽-일본 반도체 소재 동맹은 단순한 양자 협력을 넘어 'EU-Japan 반도체 소재 표준화 이니셔티브'로 발전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소재 규격과 인증 기준을 공동으로 설정함으로써 제3국 기업들의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고 공급망 내 선점 지위를 굳히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소재 업계 장기공급계약(LTA) 확산 흐름과 맞물려, 유럽-일본 소재 동맹은 향후 반도체 소재 글로벌 조달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이 블록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거나 독자적 경쟁력을 유지하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 연합 구도에서 능동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포토레지스트, CMP 슬러리, 식각 가스 등 핵심 소재의 기술 자립도를 더 높이고, 동시에 유럽·일본과의 소재 공동 연구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해 기술 네트워크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